이윽고 슬픈 외국어
이윽고 슬픈 외국어 | 무라카미 하루키 | 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 | 2013
국가도 사람도, 좌절이나 패배라는 게 어느 부분에서는 역시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p.18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라는 것을 발견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바꿔 말하면, 자신의 의문을 얼마나 세세하고 구체적으로 압축시킬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될 것이다. p.69
단어가 막힌다든가, 문법을 틀린다든가, 발음이 부정확하다든가 그런 건 외국어니까 어느 정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일본어로 술술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은 외국어를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역시 그 언어로 능숙하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p.177
길을 걸어가다 대여섯 살쯤 되는 미국 꼬마 아이가 멋진 영어로 술술 말하는 걸 들으면 "애들도 이렇게 영어를 잘하는데" 하고 생각하며 아연해지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이고, 일일이 아연해할 일이 아닌데도 왠지 문득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 p.179
내가 삼십 대였다면 이 기회에 열심히 분발해서 어떻게든 영어를 내 것으로 만들려고 했겠지만, 사십 대도 절반이 넘어 점점 남은 세월을 계산하며 일을 하게 되다 보니, 본래의 내 일 이외의 다른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다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안타깝게도. p.271
그러나 번역이라는 것은 원래 하나의 언어로 쓰인 것을 '어쩔 수 없이 편의적으로' 다른 언어로 바꾸는 작업이기 때문에 아무리 정성을 들여 꼼꼼하게 해도 원본과 완전히 똑같을 수는 없다. 번역에 있어서 뭔가를 취하고 뭔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뭔가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취사선택'이라는 것은 번역 작업의 근간에 있는 개념이다. p.275
일본을 떠나 오랫동안 외국에서 살면 일본어가 변하지 않습니까, 하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미국인이 묻기도 하고, 일본인이 묻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본인으로서는 좀처럼 알기 어려운 일이다. (중략) 언어나 문체의 변화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언어란 항상 변하는 것이고,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변화해가는 것이다. 그것은 공기에 따라 변하고,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에 따라 변화한다. 교제하는 상대와 연령에 따라 변하고, 자신의 입장 변화에 따라 변한다. 그리고 외국에서 산다는 것도 그런 변화 요인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간단하게 예스, 노로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p.290~291
그러나 '슬픈'이라고 해도 그것이 외국어로 말해야 하는 것이 힘들다거나, 아니면 외국어를 잘 말할 수 없어 슬프다는 건 아니다. 물론 조금은 그럴지 몰라도 그것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무슨 연유인지 내게 자명성(自明性)을 지니지 않은 언어에 이렇게 둘러싸여 있다는 상황 자체가 일종의 슬픔과 비슷한 느낌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p.295~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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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은 무리카미 하루키 에세이. 비채에서 나온 에세이 시리즈보다 조금 더 젊은 시절에 쓴 에세이다.
자신이 30대였다면 영어를 열심히 공부해 내 것으로 만들려고 했겠지만, 40대 중반을 넘기다 보니 그러긴 힘들다고 한 부분에서 왠지 모를 용기를 얻었다. 그래, 난 늦지 않았어(요즘처럼 오래 사는 시대에 40대도 늦은 건 아닌데;). 영어 공부 좀 하자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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