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의 유령들
알제리의 유령들 | 황여정 | 문학동네 | 2017
"기다린다는 말이 좋다고. 기다린다는 거. 뭔가를 기다린다는 거 말이야." p.22
시대는 운명을 다한 것들을 돌아보지 않는다. 흔적을 추슬러 그것들을 잊지 않게 만드는 건 언제나 몇몇의 개인들이며, 그들조차도 기력이 다할 때가 온다. p.92
사람은 어쩌자고 사랑이라는 걸 하게 되는 것인가, 생각했다. 그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p.107
잊었다는 자각도 없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기억에서 말끔히 사라진 건 그 일뿐만이 아닐 터였다. 시간은 언제나 쏜살같지만 인생은 의외로 길다. p.120
모름지기 모든 글의 첫 문장은 글쓴이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언제나 그 글 전체의 본질을 규정하는 동시에 그 글이 쓰이게 된 최초의 동기를 드러내는 법이었다. p.136
나는 눈을 감고 행복하게 미소 짓는 당신의 눈을 그려봐요. 그리고 내가 당신의 모든 것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게 기뻐요. p.151
"모든 이야기에는 사실과 거짓이 섞여 있네. 같은 장소에서 같은 걸 보고 들어도 각자에게 들어보면 다들 다른 이야기를 하지. 내가 보고 듣고 겪은 일도 어떨 땐 사실이 아닐 때도 있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른 채 겪었거나 잘못 기억하고 있거나. 거짓이 사실이 되는 경우도 있지. 누군가 그걸 사실로 믿을 때. 속았을 수도 있고 그냥 믿었을 수도 있고 속아준 것일 수도 있고 속고 싶었을 수도 있고. 한마디로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 애초에 자네가 판단할 수 없는 문제라는 거야. 그렇다면 애초에 판단할 수 없는 문제이니 판단을 안 할 건가?" p.163~164
"자네가 어떻게든 알아내고 싶다는 거, 알아내겠다는 거. 그게 바로 진실이네." p.166
"우리는 서로에게 뭘 해줘야 하는지 몰랐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했는데 뭘 해줘야 하는지 모르겠더라. 우리는 각자 망가져 있었고 망가졌다는 걸 누구에게라도 표현해야 했는데 그러려다 서로를 더 망가뜨렸어. 왜 우리가 이렇게 됐는지를 생각하면 더 참을 수가 없어져서... 뭐래도 했어야 하는데... 뭘 해야 할지를... 나는..." p.184~185
어쩌면 나는 돌아가려는 게 아니라 다만 도망가고 있는 게 아닐까 가끔 생각해.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나는 그 시간들이 나에게서 멀어지기를 기다렸으니까. 완전히 잊힐 리는 없을 테지만 적어도 거리감은 생기기를. 벽에 걸린 그림을 마주하듯 무심히 바라볼 수 있을 때까지. p.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