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주정뱅이
안녕 주정뱅이 | 권여선 | 창비 | 2016
요앙원 사람들은 수환이 죽었을 때 자신들이 연락 두절인 영경에게 품었던 단단한 적의가 푹 끓인 무처럼 물러져 깊은 동정과 연민으로 바뀐 것을 느꼈다. 영경의 온전치 못한 정신이 수환을 보낼 때까지 죽을힘을 다해 견뎠다는 것을, 그리고 수환이 떠난 후에야 비로소 안심하고 죽어버렸다는 것을, 늙은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p.39
요리는 불과 물과 재료에만 집중해야 하는 일이다. 요리를 하면 할수록 그녀는 요리가 창조적인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똑같은 요리를 반복해도 결코 똑같은 맛을 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녀를 실망시키기는커녕 더욱 매혹시킨다. p.84~85
어쩌면 기억이란 매번 말과 시간을 통과할 때마다 살금살금 움직이고 자리를 바꾸도록 구성되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p.106
삶에서 취소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도 없다. 지나가는 말이든 무심코 한 행동이든, 일단 튀어나온 이상 돌처럼 단단한 필연이 된다. p.136
"이를테면 과거라는 건 말입니다."
마침내 경련이 잦아들자 그가 말했다.
"무서운 타자고 이방인입니다. 과거는 말입니다, 어떻게 해도 수정이 안 되는 끔찍한 오탈자, 씻을 수 없는 얼룩, 아머리 발버둥쳐도 제거할 수 없는 요지부동의 이물질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기억이 그렇게 엄청난 융통성을 발휘하도록 진화했는지 모릅니다. 부동의 과거를 조금이라도 유동적이게 만들 수 있도록, 육중한 과거를 흔들바위처럼 이리저리 기우뚱기우뚱 흔들 수 있도록, 이것과 저것을 뒤섞거나 숨기거나 심지어 무화시킬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의 기억은 정확성과는 어긋나는 방향으로, 그렇다고 완전한 부정확성은 아닌 방향으로 기괴하게 진화해온 것일 수 있어요." p.168~169
그녀는 그가 언제부턴가 자기 자신을 '저'가 아닌 '나'로 칭하는 걸 느꼈고 그것만으로도 그와의 거리가 좁혀진 듯한 느낌이 들어 기뻤다. p.171
그 만남이 행인지 불행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 불행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감지되고 어떤 불행은 지독한 원시의 눈으로만 볼 수 있으며 또 어떤 불행은 어느 각도와 시점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불행은 눈만 돌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있지만 결코 보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p.176
꼼장어 토막에서 밀려나오는 투명하고 길쭉한 내장들처럼, 남자들 속에 숨어 있다 슬금슬금 비어져나오는 왜소하고 더러운 내면의 고추들을,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보아왔고 아마 오래도록 보게 될 것이었다. p.237~238
물론 그런 상상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는 그도 알았다. 그러나 터무니없어서 더 간절해지는 희망도 있고, 그런 희망 때문에 미친 활기가 생기는 시절도 있다. p.239
해설 / "이런 얘기 해도 되나?"라는 선미의 불길한 말, 이 말은 인생이 몹쓸 농담을 던질 때 그 농담을 배달하는 역할을 하는 이들의 상투어다. 인생이 농담을 하면 인간은 병드는데, 농담의 대상이 되는 사람도 병들지만 대상이 되고 싶지 않아서 늘 배달만 하려 드는 사람도 그 자체로 환자다.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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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헝헝, 갓여선. 충성충성충성!